[ 최고 의가 나타날 때까지 ]
바울이 정의했던 ‘의’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“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”를 이해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1절과 12절에서 “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니라”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바울이기 때문에 그 바울이 말하고 기록한 ‘의’로 본문에서 말씀하신 의를 바울의 언어로 표현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. 그 의가 서로 다른 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.
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‘의’는 하나님께서 공정하시다고 의롭다고 여겨시는 것인데 그렇다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마음의 상태 그러니까 주리고 목마른 그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여기신 것이고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.
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데요. 저희는 배부를 때 무엇인가 목으로 넘어가서 신체 기관인 위와 장에 음식물이 들어가서 포만감을 느끼는 상태가 “배부르다”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음식이 아니라 ‘의’에 대해서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한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“배부를 것임이요”라고 말씀하셨는데 “배부를 것임이요”에는 ‘꼴을 먹이다’ ‘실컷 먹이다’ ‘배부르다’ ‘채우다’라는 뜻이 있습니다. 그러니까 뭘 먹어서 배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지는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.
그러니까 세상을 살면서 저희는 궁핍하거나 늘 무엇인가 필요로 하는데 그런 필요는 언제나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들인데 그래서 사람이 하면 그만인 것들인데 그것들로는 사람이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이 채우지 못하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. 그것을 누구에게 행하시는 것이죠? ‘의’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. 그러니 저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끼리 죄도 죄처럼 여기지 않고 “어~ 그정도는 괜찮아 그쯤이면 괜찮지”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그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, 성경의 기준에서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그것들에 대한 굶주림 갈망, 열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 하나님께서 먹여주시고 배부르게 만족할만한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.
그래서 저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? 세상의 불의와 하나님의 의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. 세상에서는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좋고 그냥 사람이 좋을만한 것은 다 좋다고 합니다. 기준을 사람에게 두는 것입니다. 그런데 하나님께는 아닌 것이 있습니다.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게 사람이 좋은 것들로만 또 사람이 만족할만한 것으로만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정선 경계에 다다르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그 가운데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실 때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의 ‘의’가 기준이 되어서 저렇게 살아왔나도 보시는 것입니다. 그런 사람은 자신들이 괜찮고 좋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닐수도 있다는거에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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